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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4호

창가에 화분
수상한
그녀
에세이
글 이수현 (소설가, 도서 ≪기록하는 태도≫,
≪유리 젠가≫ 저자)

“저는 따점할게요.”

언젠가부터 엠마가 이상했다. 워낙 사람들을 좋아해 빠지는 자리가 없었던 입사 동기 엠마는 자주 따로 점심을 외치기 시작했다. 회사 쓰레기통 근처에서 한참을 서성이거나 정시가 되면 큰 배낭과 마스크를 챙겨 든 채 급히 사라지는 일. 회식을 거절하는 일이 잦아지는 등 그녀의 갑작스러운 변화는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언젠가부터 그녀의 표정은 달뜬 듯 생기가 가득했다. 비밀투성이인 그녀가 나는 자꾸만 궁금해졌다.

어느 주말 아침, 우연히 망원역 앞에서 낑낑대며 어디론가 향하는 엠마와 마주쳤다. 커다란 배낭과 함께 그녀의 손에는 에코백 두 개가 들려있었다. 호기심 가득한 나의 표정에 엠마는 선뜻 내게 같이 가보지 않겠느냐 제안했다. 발길이 멈춰 선 어느 상점 앞, 나는 고개를 들어 간판을 보았다. 알맹상점. 엠마는 드디어 커다란 배낭 지퍼를 열었다. 말린 커피 가루 봉지와 고장 난 프린터 토너, 그리고 폐건전지와 병뚜껑 몇 개를 익숙한 표정으로 사장님께 건넸다. 알맹상점은 말 그대로 세제 리필 스테이션으로 샴푸나 린스, 곡물과 같은 것들의 알맹이만 파는 곳이었다. 계산을 끝낸 엠마는 내게 선물이라며 작은 화분 하나를 건넸다. 커피 찌꺼기로 만들었다는 화분은 한눈에 보기에도 앙증맞고 향이 좋았다.

“요새 내가 너무 이상했지?”

굽이진 골목길을 걸으며 엠마가 내게 물었다. 이내 엠마는 깊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자기 고향은 제주인데, 명절에 내려갈 때마다 언젠가부터 옥색에서 잿빛이 된 애월 앞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고 했다. 북서풍에 쓸려온 색색의 플라스틱 쓰레기가 현무암 사이에 나뒹굴고, 가마우지가 그 속을 쪼아 먹다 죽는 모습이 마음에 가시처럼 깊게 박혔더랬다. 고향에 갔다 돌아오면 늘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일상 속 작은 변화를 시도하며 마음이 편해졌더랬다.

특히 요샌 퇴근 후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쓰레기를 줍는 친환경 조깅인 플로깅을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제야 그녀의 행동이 이해가 되었다. 동시에 갑자기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평소 나 역시 국내의 유명 산이나 바다로 놀러 다니는 일을 누구보다 좋아하는 사람이었음에도, 자연을 보호하는 일엔 무관심했기 때문이었다.

얼마 전 본 기사 하나가 뇌리를 스쳤다. 코로나 이후 비대면 소비의 증가로, 팔백만 톤 이상의 플라스틱 폐기물이 발생했다는 내용이었다. 비단 나도 재택근무를 하며 간편하고 맛있다는 이유만으로 내내 배달 서비스를 이용했던 터였다. 현관 앞 쌓인 배달 용기, 일회용 포장재 탑을 보면서도 난 일말의 양심의 가책조차 느끼지 않았다. 내가 사용하는 물건들이 자연을 망칠 수 있다는 생각 역시 말이다. 집에 돌아가는 길, 알맹상점에서 가져온 팸플릿을 펼쳐보았다. 첫 줄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5R이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바뀐다.’

필요치 않은 것은 거절하고(Refuse), 거절할 수 없는 것은 줄이고(Reduce), 줄일 수 없는 것은 재사용하고(Reuse), 재사용할 수 없는 것은 재활용하고(Recycle), 나머지는 썩히는 방식으로 퇴비화(Rot)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로 웨이스트 운동의 창시자 비 존슨이 한 말이라고 했다. 문장 위로 엠마의 그간 행적이 겹쳐 보였다. 무분별한 식습관을 고치고, 작지만 건강한 습관을 만들며, 생활의 흔적을 한곳에 모아 가치 있게 만들려는 움직임 말이다. 어쩌면 유난스러워 보였던 그녀의 변화는 모두 의미 있는 것들이었다.

엠마가 준 화분에 수선화 씨앗을 심었다. 창을 여니 어느새 찾아온 따스한 봄바람이 코끝을 간질였다.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봄의 변주곡처럼 들렸다. 따사로운 햇살을 내리쬐며, 앞으로 이 땅을 살아갈 새 생명들에 산과 들, 하늘 등과 같은 아름다운 풍경을 온전히 물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부터는 엠마와 함께 플로깅을 시작해 봐야지.’

새삼 내게 작지만 단단한 변화의 씨앗을 심어준 엠마가 고마웠다.
둥. 둥. 어디선가 새로운 봄이 움트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