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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9+10호

밥과 반찬그림

우리들의 다정한 끼니들

밸런스 에세이
글. 김수경(도서 «끼니들», «집, 사람», «소박하고 근사하게» 저자)

덥고 심심한 여름 방학 동안 아이들의 가장 큰 즐거움은 엄마가 만들어주는 맛있는 음식인 모양이었다. 무더위에 끓이고 찌고 볶느라 불 앞에서 땀을 뚝뚝 흘리는 와중에도 뭘 만들어 낼 때마다 아이들이 즐거워하며 환호하는 것이 기운을 나게 한다. 내기가 무섭게 접시를 싹싹 비우는 아이들에게는 손품이 많이 들더라도 맛있는 음식을 궁리했다가 만들어주고 싶어진다.

식사 준비를 하고 있으면 주방에 달려와 “오늘의 요리는 뭐예요?”하고 늘 묻는 작은 아이는 아직 손질 중인 재료만 보고 무슨 요리일지 알아 맞히는 것을 참 좋아한다. 내게 정답을 확인받으면 조금만 크게 말해도 안 들릴 곳이 없는 작은 집에서도 식구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오늘의 요리 제목을 큰 소리로 선전한다. 이를테면 남편 책상 앞으로 달려가 “오늘 저녁은 두툼한 달걀말이를 넣은 김밥이래요!”라고 말하고 금방 형아 방으로 달려가 다시 한번 “오늘 저녁은 두툼한 달걀말이를 넣은 김밥이야!” 하는 식이다.

찬거리가 신통치 않던 어느 날은 냉장고 문을 열고 서서 눈으로 재료들을 훑으며 궁리를 했다. 냉동실에 넣어둔 묵은 김이 눈에 띄어서 김밥을 말아보기로 했다. 재료가 없으면 없는 대로 또 맛이 나는 것이 김밥이니 내 맘대로 싸보자 싶었다. 다시마 두 조각을 넣어 고슬고슬 지은 밥에 식초와 아가베 시럽, 소금으로 간을 하고 설설설 흩트려 한 김 나가게 둔다. 그 사이 쯔유로 맛을 낸 달걀을 길고 도톰하게 말고 오이채를 썰어 물기를 꼭 짜고 새콤달콤하게 절인 당근채를 꺼냈다. 도마 위에 김발을 펼치고 김을 한 장 올린다. 밥 한 주걱을 올려 잘 펴고 도톰하고 길쭉하게 부친 달걀말이 하나, 오이·당근채를 풍성하게 올려 야무지게 꼭꼭 눌러가며 말아준다. 통통한 김밥 위에 손가락 솔로 참기름을 썩썩 바르고 칼로 슬근슬근 잘라 한 접시씩 옮겨 담는다. 한 알을 입에 넣으면 양 볼이 불룩해질 정도로 커다란 김밥이었다. 식탁에 모여 앉아 모두 서로의 불룩한 볼을 바라보며 만족한 듯 웃었다.

입추 날 아침 바람 속에는 신기하게도 가을이 담겨있었다. 여름 방학이 끝나가고 폭염과 열대야로 지리했던 여름도 결국 가려는가 보다. 잠깐 긴장이 풀어진 사이 몸이 고단하다는 신호를 울렸다. 편도가 부어올라 가슬가슬 불편하더니 속탈이 나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에어컨 바람도 가닿지 않는 주방 불 앞에서 하루 세끼를 짓느라 고군분투하다가 또 찬 바람 속에 앉았다가를 반복한 것이 속탈의 이유였을 것이다.

두 아이의 방학 동안 재택근무자인 남편까지 네 식구의 세끼를(때때로 간식까지) 챙겨야 하다 보니 나만 방학이 아닌 방학이구나 싶다. 어디에선가 몸은 35세까지만 무료고 그 후부터는 유료로 전환된다는 글을 읽고 고개를 끄덕인 적이 있다. 올 6월부터 모두가 만 나이가 되어 회춘을 했다는데 그래도 앞자리를 바꾸지 못한 나는 요즘 하룻밤 잘 못 자고 한 끼를 잘 못 먹거나 일 한 가지에 마음을 잘 못 써도 금방 탈이 나곤 했다. 속탈로 찾아온 여름을 앓고 누워 있는 동안 두 아이와 남편이 편의점을 털어 밥과 국을 따뜻하게 데우고 그릇에 옮겨 상을 차려놓고 나를 깨웠다. 비록 즉석식품이지만 나름대로 각고의 정성으로 차려진 기특한 끼니였다. 내가 국에 말은 밥을 한 술 크게 떠 넣으니 두 아이와 남편은 안도했다는 듯 마주 웃었다. 그 따뜻한 한 끼 덕분에 저녁에는 툭 털고 일어나 다시 주방에 섰다. 나물밥을 지으려고 곤드레나물을 물에 푹 담가 보드라워지도록 폭폭 삶았다.

나물 삶는 구수한 냄새가 마치 차를 우리는 것과 닮아
탈이 나고 고단했던 몸과 마음이 차분히 다스려졌다.
열어놓은 주방 창으로 기분 좋은 가을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