갖은 노력에도 벗어날 수 없는 가난. 장대익 신부는 주임신부인 파디 신부의 제안에 따라 캐나다 유학길에 올라 1957년 11월, 코디 연구소가 있는 캐나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대학에서 협동조합을 배웠다.
귀국 후 1959년 8월, 서울교구 후원으로 서울 중구 소공동에 사무실을 낸 장대익 신부는 본격적으로 신협운동에 대한 구상을 구체화해나갔다.
본격적인 여름 문턱을 넘어가기 전인 1960년 6월 26일, 계성여중 음악실로 사람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 중 장대익 신부도 있었다. 오후 2시, 한낮의 열기는 음악실에 비할 바가 되지 못했다. 드디어 한국 최초의 신용협동조합 중 하나인 ‘가톨릭중앙신용조합’이 출범했기 때문이다. 이날 함께 참석한 예수회 출신 바실 프라이스 신부는 ‘조직을 빨리 넓힐 것이 아니라 천천히 그러나 깊이 발전시켜나가야 국가와 이웃에 복지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축사했다. ‘천천히 그러나 깊이’. 이 말은 장대익 신부가 평생 신협운동을 함에 있어 하나의 방향이 되었다.
장대익 신부는 신협을 전파하기 위해 종교의 벽을 뛰어넘은 것은 물론, 꺼지지 않는 에너지로 전국을 누비며 수백 차례가 넘는 강연을 이어갔다. 전진하는 그의 발목을 잡는 날도 있었고, 바람과 달리 신협 조직의 확산세가 느림보 걸음을 하여 고민하는 날도 있었다. 하지만 장대익 신부는 신협운동은 그 자체로 보이지 않는 뿌리가 되어 확산해나가는 중이라 믿으며 소명을 다했다. 늘 제일 낮은 곳에서 웃으며 기꺼이 서민들과 함께했던 장대익 신부. ‘노가다 십장 신부’라는 이름표가 붙어도 이는 그에게 훈장이나 다름없었다. 가난의 절망에서 희망을 눈뜨게 한 사랑과 헌신, 우리는 그를 잊지 않고 영원히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