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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호

국내 최초 신협
부산 성가신협을 찾아서
CU 역사관
정리.편집실

전국 곳곳에 자리하여 서민금융에 힘을 쓰고 있는 신협.
길을 걷다 쉽게 볼 수 있어 너무나 익숙한 존재가 되었지만,
문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국내 최초 신협 1호점은 어디지? 그 자취를 찾아 떠났다.
그 여정의 출발점은 부산.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이야기를 따라 걸음을 옮겨보았다.

1950

시간여행의 시작, 아픔으로 가득했던 1950년대

1950년대,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의 무자비한 약탈로 최빈국 신세가 된 우리나라는 독립하자마자 한국전쟁이라는 비극의 소용돌이로 들어가게 되었다. 1953년 7월 휴전협정 이후 우리나라는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모든 것을 시작해야 하는 처지였다. 더 이상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가난함.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원조를 기반으로 전후복구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며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현실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높은 실업률과 공장 조업 중단 등 말이 아닌 경제 상황 속에서 1957년 경제부흥 5개년 계획이 시작되었다. 정부는 일제강점기 때 설립되었던 농촌 지역의 금융조합, 농회, 축산조합, 원예조합과 어촌 지역의 어업조합을 기반으로 농업협동조합과 수산업협동조합 설립을 위한 입법 조치를 추진했다. 그 결과 법률 제정을 통해 1958년 4월에 특수법인 농업은행이, 같은 해 5월에는 농협중앙회가 발족했다. 그럼에도 굶주림에서 벗어나기는커녕 빈곤의 악순환만 계속되었다. 문제는 ‘자립’이 아닌 ‘자선’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 가난을 극복할 수 있는 진정한 길은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협동을 실천하는 방법뿐이었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자조 정신을 바탕으로 협동을 통해 빈곤의 악순환을 끊기 위한 신협운동이 싹을 틔웠다. 그 출발은 ‘한국 신협운동의 어머니’라 불리는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로부터 시작되었다.

성가신용조합 및 협동조합 교도봉사회 전경

한국 최초 성가신용조합의 탄생

1952년부터 부산 메리놀병원에 근무하며 구호활동에 앞장섰던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는 1957년 12월부터 1958년 1월 사이 캐나다에서 *안티고니시 운동을 공부하고 귀국한 후 신협운동과 정신을 한국에 이식하고자 했다. 그 결과 1960년 3월 19일부터 부산 메리놀병원에서 7주간 신협 창립의 전 단계로서 강습회가 개최됐다. 강습회는 종교에 구애받지 않고 가톨릭 신자 외에 개신교와 불교 등 다른 종교인들을 상당수 포함했다. 신협운동은 어느 특정 집단을 위한 것이 아닌 우리 모두의 희망을 담은 운동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리고 역사적인 순간이 왔다. 1960년 5월 1일, 마침내 한국 최초의 신용협동조합인 성가신용조합이 탄생했다. 가입한 조합원은 27명, 이날 모인 출자금은 모두 3,400환(약 10만 원). 가브리엘라 수녀가 1번 조합원으로 추대되었다. 성가신협은 사채금리가 월 10%를 넘던 당시, 미국 신협과 동일한 1% 이자로 서민 자활을 도왔으며, 이후 푼돈 저축을 통해 빈곤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민간주도의 상향식 협동조합 운동이 되었다.

성가신협이 첫발을 내디딘 후 약 59년의 세월이 흘러 신협은 2019년 10월을 기준으로 전국에 884개 조합 및 1,655개 영업점, 자산 100조 원 및 이용자 1,300만 명을 보유한 민간 금융협동조합이 되었다.

* 안티고니시 운동: 캐나다 노바스코샤주의 마을인 안티고니시에서 일어난 협동조합운동. 1929년 대공황으로 찾아온 불황을 이겨내기 위해 농어촌의 경제를 연구, 협동조합운동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유통 구조 개선부터 가난한 민중들이 직접 협동조합운동가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하는 등의 결실을 거두며 안티고니시는 협동조합의 상징 도시가 되었다.
1960

현재, 1960년 5월 1일 역사의 흔적

그리고 현재, 1960년 5월 1일의 역사는 어떻게 자취를 남기고 있을까? 부산의 중구로 향한다. 이곳에 한국신협 발상지 기념비 및 가브리엘라 수녀의 동상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있다. 부산가톨릭센터다. 센터 건물 뒤편, 햇살이 잘 드는 자리에 기념비와 동상이 자리하고 있다.

2013년, 신협은 ‘신협발상지 기념비 이전추진단’을 구성해 접근하기 불편하고 방치된 기념비를 본래의 설립 취지에 맞게 살리고, 신협 발상지의 상징성을 더하기 위해 이곳 부산가톨릭센터로 옮겼다. 신협정신을 받아들인 부산가톨릭센터는 부지를 무상으로 제공하였으며, 신협은 가브리엘라 수녀 흉상을 추가로 설치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한국에서 신협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오직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이었습니다. 한국 국민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신협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오직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이었습니다.
한국 국민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기념비에 적힌 가브리엘라 수녀의 말이다. 6.25 전쟁 후, 궁핍한 생활 속에서 하루 먹고 살기도 힘든 시절 서민들에게 협동운동만이 살길임을 확신시킨 가브리엘라 수녀. 신협운동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근검, 절약과 교육 제일주의를 실천하며 이 땅에 진정한 희망의 씨앗을 뿌렸다. 가브리엘라 수녀가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되었다. 이제 이 땅엔 없지만 그녀가 남긴 사랑과 봉사의 정신은 신협을 통해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국제시장 속 함께 걷는 부산성가신협

옛 자취를 뒤로하고 다음 여정은 신협의 1호점, 부산성가신협이다. 현재 부산 중구 국제시장2길 20-1에 자리하고 있는 부산성가신협은 지점들을 모두 철수하고 서민들과 함께 하기 위해 국제시장 내에 본점으로 모두 모였다. 조합원 27명으로 시작했던 부산성가신협은 2020년 기준 자산 880억 원, 조합원 수 6,105명으로 성장했다.

부산성가신협 안으로 들어가면 오랜 역사의 손길이 묻어나 있는 두 가지 물품을 볼 수 있다. 하나는 서민들의 우산이 되어줄 것을 다짐하며 이를 상징적으로 담은 신협기, 그리고 옛스러운 서체로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현판이다.

이를 고이 간직하고 있는 부산성가신협은 신협운동이 처음 발족했을 때의 시대정신을 근간으로 조합원들에게 다가가고 있다. 부산성가신협은 성가신협만의 기본방침을 두고 있다. ‘조합원의 복지증진과 교육홍보활동 강화’, ‘금융환경변화의 신속한 대응으로 리스크의 최소화’, ‘적극적인 대출 활성화로 자금 운용의 건전성 향상’, ‘임직원의 역량 강화 및 사회공헌활동’. 이 네 가지 기본방침은 그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부산성가신협이 지키고자 하는 운영철칙이다.

부산성가신협과 가브리엘라 수녀와의 끈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부산성가신협은 가브리엘라 수녀가 속했던 메리놀수녀회의 메리놀병원과 MOU를 체결하고 조합원들의 건강증진을 위해 다양한 무료·할인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입니다’. 사회를 위해 먼저 나서서 도움의 손길을 내민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 굉장히 어려운 일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래서일까? 가브리엘라 수녀의 노력, 그리고 이를 끝까지 지키려는 신협.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을 먼저 나서준 이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신협연합회 창립총회 기념사진(1964.0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