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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호

하늘배경
끓는 점에서 만난
행운
에세이
글. 이수현(소설가, 도서 «기록하는 태도», «유리 젠가» 저자)

나는 가짜 엄마가 되는 일을 택했다. 넉넉지 않은 형편에 형부와 함께 늦은 시간까지 맞벌이하는 언니의 뒷모습이 짠하게 느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결국 바로 옆 동에 사는 내가 언니네의 육아 돌보미를 자처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조카들을 위해 내가 관심을 둔 곳은 바로 중고 거래 앱이었다. 더욱이 이 서비스는 상대에게 받은 긍정 거래 후기에 따라 나의 매너 온도가 올라가는 꽤 흥미로운 시스템이었다. 오랜 경력과 좋은 후기로 어느덧 나는 99도를 향해 가는 중이었다. 무엇보다 이 앱을 통해 아이들이 싫증 내는 장난감을 팔아 다른 장난감을 구매하기도 하고, 기저귀 나눔이나 벼룩을 통해 운 좋게 좋은 물건을 건질 수 있다는 것도 좋았다. 말캉거리는 뽀얀 볼의 쌍둥이 조카들이 새 장난감에 더없이 행복해할 때는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도 행복이 가득 차오르는 것 같았다.

앱 알림음이 울렸다. 삼십 분 전 올려놓은 유모차에 관심을 보인 고객이 생긴 것이다. 이렇게 빨리 입질이 오다니, 웬 행운인가 싶었다.

‘저, 유모차에 관심이 있는데요.’

‘네. 직거래 가능하시죠? 어디가 편하실까요?’

오래된 경력자답게 나는 중고 거래 대화의 흐름을 주도해나갔다. 이제 걸어 다닐 나이가 된 조카들에게는 유모차를 판 비용으로 예쁜 겨울 패딩을 사줄 생각이었다. 나는 짐짓 설레는 마음을 가라앉힌 채 상대의 답변을 기다렸다. 그런데 안 읽음 표시가 사라졌음에도 상대는 한참 답이 없었다.

‘저, 죄송한데 혹시 제가 아이가 한 명이라 한자리만 필요한데 반값에는······안 될까요?’

이게 무슨 소린가. 쌍둥이 유모차는 일체형이라 반으로 잘라서 팔 수도 없는데, 그럼 애초에 묻지도 말았어야지. 나는 상대의 어이없는 협상에 갑자기 눈에서 불이 일었다. 가끔 중고 거래 앱에는 이런 경우 없는 사람들도 있다니까. 어이가 없어서 한숨을 내쉬었다.

시세의 반값으로 내놓았는데 거기서 또 깎아달라는 상대의 요구가 괘씸했다. 거래를 종료하려던 차, 상대는 한참 답이 없다가 마지막 답장을 보냈다.

‘사실 제가 아이를 혼자 키우는 어린 엄마라서요. 아이가 어려 어딜 두고 나갈 수도 없고, 갑자기 유모차가 올라와 반가운 마음에 무리한 부탁을 드렸습니다. 죄송해요.’ 갈 곳을 잃은 손가락은 자판 위를 계속 맴돌았다. 얼마나 급했으면 그랬을까. 나는 더 이상 묻지 않고 거래하겠다고 답했다. 쌍둥이들의 손을 잡고 유모차를 끌며 나는 서서히 역을 향해 걸었다. 지하철 출구 앞에서 마주한 아이 엄마는 작은 점처럼 서 있었다.

자세히 보니 학생 티를 채 벗지 못한 아주 앳된 엄마였다. 그녀는 포대기에 아이를 꽁꽁 감싼 채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한겨울임에도 얇디얇은 카디건을 하나 입은 상태였다. 게다가 급한 마음에 뛰어왔는지 그녀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포대기 속 아이 역시 얼굴이 빨갰다.

“나이가 어떻게 돼요?”

“아, 사 개월이요.”

“아니. 아기 말고 그쪽이요.”

“저, 열···여섯이요.”

놀란 마음을 애써 숨긴 채 나는 그녀와 아이를 번갈아 봤다. 아이가 아이를 키운다는 말이 딱 들어맞았다. 만 원짜리 지폐 몇 장을 전해주는 그녀의 손을 한사코 거절했다. 유모차는 깨끗이 소독했으니 집에 가서 한 번만 더 물티슈로 닦아주면 된다고 했다. 고마움과 미안함으로 점철된 그녀는 말도 제대로 못 한 채 발만 동동거렸다.

거래를 끝낸 뒤 쌍둥이들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나는 다시 그녀를 불러 세웠다. 하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서 그녀의 목에 감아주었다. 주머니에 있던 핫팩을 아기를 감싼 보따리 옆에 넣어주었다. 그렇게 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뽀얀 볼의 그녀는 연신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집으로 가는 길 알림음이 울렸다. 중고 거래 후기였다.

‘추운 날, 펄펄 끓는 마음을 만났습니다.
헤아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매너 온도와는 상관없이 그저 누군가의 지친 하루에 행운이 되었길 바라며
집을 향해 걸었다. 첫눈이 내렸고 쌍둥이들은 방방 뛰었다. 점점 진짜 엄마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희고 둥근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