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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8월호

급변하는 사회 속
현대 중국의 토대를 만들다
마오쩌둥 vs 장제스

중국은 다양한 민족이 모여 거대한 땅에서 삶을 일구고 있는 현재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국제 정세에 다양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런 현대 중국이 완성되기까지 큰 영향을 미친 두 인물이 있다.
역사의 흐름에 따라 협력하기도 대립하기도 했던 장제스와 마오쩌둥을 통해 중국의 근대사를 알아보자.
마오쩌둥
1893~1976년
중화인민공화국 초대 주석
중국 공산당의 당수
공산주의 역사의 핵심인물이자 독재자
중화인민공화국 초대 주석이자
논란의 인물
중국 공산당의 당수 마오쩌둥은 장제스를 상대로 한 내전에서 승리하며 중국 대륙을 차지한 정치가다. 그가 통치한 중화인민공화국은 소비에트 연방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내부의 혁명을 통해 공산화에 성공한 국가로 꼽힌다.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할 당시 창사사범학교에 다니던 그는 소련 볼세비키 정권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1920년 11월 중국 공산당이 창당된 후 열린 제1차 당대회에 참여하며 본격적인 활동 범위를 넓힌다.
1926년 마오쩌둥은 농민 세력을 규합해 장제스의 국민당과 힘을 합쳐 후난 성의 군벌을 물리치며 정치적 영향력 또한 확대한다. 하지만 국민당과의 합작이 깨지고 공산당의 활동에 위기감을 느낀 국민당은 1927년부터 대대적인 공세를 시작했다.
이때 공산당은 대장정을 시작, 1934년 10월부터 1935년 6월까지 죽음과 고통으로 가득한 행군을 진행하고 1936년 중국 서부 지역에서 기회를 기다리며 내실을 다졌다. 마오쩌둥은 일본이 패망한 이후 국민당과 내전을 시작하고, 1949년 국민당을 대만으로 몰아낸다.
본격적으로 중화인민국화국의 통치에 나선 그는 이후 대약진운동을 통해 중국재건에 나서지만 1960년 대기근으로 인해 실패로 끝나고 당의주도권을 빼앗기게 되자 반대파들을 숙청하고 문화대혁명을 진행한다.
마오쩌둥은 중국의 최고 통치자가 된 이후 수많은 학살과 숙청을 자행했으며 국가 재건이라는 미명하에 대약진 운동이나 문화대혁명 등을 일으켜 인민을 힘들게 했다. 그러나 그는 중국 공산당의 정신적 지주이자, 현대 공산 중국을 탄생시킨 국부로 불리며 중국의 모든 위안화의 앞면에는 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장제스
1887~1975년
중화인민공화국 제1~5대 총통
타이완 중화민국 총통
항일 운동가이자 독재자
중국을 통일했으나
대만으로 쫓겨난 독재자
장제스는 위안스카이의 매국으로 붕괴된 청나라를 다시 통일한 인물이다. 장제스는 스승 쑨원의 ‘삼민주의’ 사상을 계승해 중국 북쪽지역 정벌을 감행하며 분열된 중국을 하나로 통일했다.
당시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으로 중국을 침략한 일본에 대항해 중국을 방어하던 장제스는 당시 조선의 독립군들을 지원하며 국제 사회에서 중국의 존재감을 키웠다.
중국은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는 동안 일본의 육군을 대륙에 붙잡아 두고 엄청난 인적·물적 출혈을 입혔으며, 전쟁이 끝난 후 강대국으로 인정받았다.
장제스는 일본 제국의 대륙 공격과 난징대학살 등의 비극을 이겨내며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과 때로는 협력하며 일본에 대항했지만 중국 공산당과 전쟁 이후 마오쩌둥에게 중국 대륙을 빼앗기고 대만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후에도 그는 중국 본토를 되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대만에서 자신의 정책을 반대하는 국민들과 대립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만의 경제력을 높이고 사회 시설을 발전시켰으며, 그가 통치하던 당시 대만은 빈부 격차의 완화, 교육 수준 향상 등 아시아의 4마리의 용 중 하나로 불리며 큰 발전을 이루었다.
장제스는 누군가에게는 중국을 구한 항일 영웅이라고 불리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대만의 민주주의를 탄압한 독재자로 기억되기도 한다. 또한 잠시나마 그가 중국을 통치할 당시, 근대국가로서의 중국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