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협 선구자

선구자 장대익 신부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 강정렬 박사
믿음이 만든 기적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
장대익 신부

“신용협동조합이라는 것은 돈 많은 사람이나 부자들의 것이 아니라, 서민들이 모여 서로 돕고자 하는 단체인 것입니다.”
(1962년 제1차 신협 지도자강습회 환영사 중에서)

한국신협운동의 선구자인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의 아름다운 이야기는 1930년대부터 시작한다. 한국에서 37년 동안 봉사하면서 이름을 발음하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 발음이 편한 ‘가별 수녀’로 부른 그녀의 진짜 이름은 메리 가브리엘라 뮬헤린(Mary Gabriella Mulherin, 1900~1993)이다. 가브리엘라 수녀는 회계 전문가로, 활달하고 이목구비가 또렷했으며, 키도 크고 목소리도 컸다. 무엇보다 의지가 강해 일반적인 수녀의 이미지와는 조금 달랐다. 그 사실을 제일 먼저 감지한 이는 선교지의 말썽꾸러기 남자아이들이었다. 그중에는 이 땅에 신협의 씨앗을 함께 뿌린 장대익(1923~2008) 신부도 있었다.

1930년대, 가브리엘라 수녀는 메리놀수녀회(Maryknoll Sisters)의 일원으로 평양과 신의주지역에서 수탈당하는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맡아 한국으로 파송된다. 그러나 신사참배 거부 등으로 일본과 대립하던 메리놀회(Maryknoll Missioners)가 추방 명령을 받자 가브리엘라 수녀도 한국을 떠나게 된다.

6·25는 가브리엘라 수녀에게 새로운 사명을 깨닫게 해주었다. 다시 한국으로 온 가브리엘라 수녀는 부산 메리놀병원에서 전사자 가족들을 위한 복지 활동에 전념하다 전후복구 사업에 뛰어든다. 물론 한국의 사정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지만, 언제까지나 강대국의 선의에 기대어 살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한국 사람들 스스로 일어나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을 기르게 해야 한다.’

사회 문제에 눈을 돌린 가브리엘라 수녀는 부정과 부패가 만연하고, 1년에 원금의 두 배가 넘는 이자를 요구하는 고리대금업자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찾는다. 가브리엘라 수녀는 가난한 한국 사람들에게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57살의 나이로 캐나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St. Francis Xavier) 대학에서 안티고니시 운동(Antigonish Movement)을 배운 뒤 협동조합운동을 시작한다. 가브리엘라 수녀는 부산 메리놀병원 나사렛의 집에서 메리놀병원, 성분도병원, 가톨릭구제회 임직원들을 대상으로 한국 최초의 신용협동조합인 성가신용협동조합(聖家信用協同組合, Holy Family Credit Union)을 창립한다. 그리고 신협운동의 조직적인 보급을 위해 협동조합교도봉사회(Voluntary Cooperative Center, 협동교육연구원의 전신)를 창립해 신협 교육에 힘쓴다.

1963년, 협동조합교도봉사회를 서울로 옮기면서 서울과 부산에서 동시에 진행 중이던 신협운동을 통합해 신협의 전국적 확산을 주도했으며, 무엇보다 신협의 정신을 널리 퍼뜨릴 인적 자원인 지도자들을 양성해냈다. 강정렬, 이상호, 박희섭 등은 가브리엘라 수녀가 키워낸 1세대 지도자들이다. 이들은 1970년대부터 세계로 뻗어가며, 신협의 양적·질적 성장을 이끈다.

가브리엘라 수녀의 업적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은 개척기에 있던 한국 신협운동을 완전히 독립시키며, 신협법을 만들기 위해 첫 발자국을 내디디고, 국제적인 유대를 맺어나가는 데 앞장섰다는 점이다.

가브리엘라 수녀는 1967년 10월의 마지막 날, 한국에 온 지 37년 만에 다시 미국 메리놀수녀회 본원으로 돌아갔다. 가브리엘라 수녀가 미국으로 떠나며 남긴 것은 신협 정신을 교육하는 협동조합교도봉사회 등 신협을 이끌 지도자들과 60여 개의 지역 신협 조직, 스스로 희망을 만들어가는 초기 신협 조합원들이었다.

가브리엘라 수녀가 남긴 유산은 사랑을 바탕으로 한 자조와 자립의 정신으로, 이는 대한민국의 근대화와 시민 정신 속에 오롯이 녹아 있다.

믿음이 만든 기적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
  • 1900. 05. 29.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스크랜턴 지역 출생
  • 1916. 성 팩트릭 고등학교 졸업
  • 1918~1923.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스크랜턴 소재 허드슨 탄광회사 비서로 근무
  • 1923. 09. 24. 버나드 대학 메리놀수녀회 수도원 입회
  • 1926. 12.~1942. 최초 내한. 평안도 영유, 평양 등지에서 메리놀수녀원의 사회복지, 행정 및 교육 업무 담당
  • 1952. 한국 6·25 후 돌아와 부산 소재 메리놀병원에서 여성 피난민을 위한 복지 활동 전개. KAVA 이사 역임
  • 1957. 12.~1958. 01. 캐나다 노바스코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대학에서 안티고니시 운동 공부
  • 1960. 02. 부산에서 카를로스 마토스(당시 미국신협연합회 국제교도부 차장) 초청, 신협 조직을 위한 소개 강연회 개최
  • 1960. 03. 19. ~ 05. 01. 부산 메리놀병원에서 7주일간 신협운동에 관한 연구회 개최
  • 1960. 05. 01. 부산 메리놀병원에서 성가신용조합 창립총회(창립 멤버 27명, 출자금 3,400환)
  • 1962. 02. 01. 협동조합교도봉사회(이후 협동교육연구원) 설립, 원장으로 취임
  • 1962. 02. 부산 나사렛의 집에서 신협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잠재적 지도자 27명을 대상으로 제1차 지도자강습회 개최
  • 1962. 09. 17개 경남 지역 조합들의 연합체인 경상남도 지부 설립을 위한 창립총회 주도
  • 1963. 07. 부산 협동조합교도봉사회 사무소를 서울(현재 가톨릭의과대학 분교)로 옮겨 명칭을 협동교육연구원으로 변경
  • 1964. 03. 신용협동조합연합회 설립을 위한 전국의 발기인 13명 위촉
  • 1964. 04. 26. 서강대학 301호 강의실에서 지도자 양성 및 조합 조직 활동을 위한 신용협동조합 연합회 창립총회 개최, 초대 전무 피선
  • 1966. 한국에서 개최된 제5차 아시아 지역 농업금융회의에 농림부 초청으로 대표 겸 참관자로 참석, 농림부 장관 표창
  • 1967.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신협연합회에서 국제개척자로 표창
  • 1967. 11. CUNA로부터 인간 생활 향상과 신협운동에 기여한 공로로 금장특별회원 추대
  • 1971. 04. ACCU 창립총회에서 한국 신협운동에 기여한 공으로 감사패 수상
  • 1971. 연합회 대의원총회에서 한국 신협운동에 기여한 공으로 감사패 수상
  • 1981. 은퇴
  • 1982. 04. ACCU 창립 10주년 기념 감사패 수상
  • 1982. 06. 한국 정부로부터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 감사패 수상
  • 1993. 05. 12. 선종(오전 10:06, 미국 뉴욕 메리놀수녀원 주거 요양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