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협 선구자

선구자 장대익 신부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 강정렬 박사
신의 마음을 전한 신부 장대익 신부
장대익 신부

장대익 루도비코 신부. 2008년 85세로 선종한 장대익 신부의 삶에는 한국 근대사의 수난과 그것을 이겨낸 사랑과 헌신이 오롯이 담겨 있다. 주머니에 사탕을 넣어 다니며 어린아이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한 장대익 신부는 팔복八福이 넘치는 삶을 살았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슬픔에 애통해했으며, 그들을 온유하게 감싸 서늘한 물가로 인도했으며, 평생 마음이 가난한 자들과 함께 웃었으며, 신을 섬기고 그들을 위하겠다는 정결한 마음으로 살았다.

장대익 신부의 일생을 말할 때 빠뜨릴 수 없는 사실은 ‘지상에서의 삶을 보다 나은 곳으로 이끈 목자’라는 사실이다. 신용협동조합을 도입한 선구자. 장대익 신부는 아직 해가 뜨기 전, 새벽부터 일어나 씨앗을 뿌린 농부였다. 그는 이 땅의 민중처럼 헐벗은 맨발, 굳은살이 박인 맨손으로 그 열매를 함께 가꾸어나갔다. 1923년에 태어난 장대익 신부는 열두 살 무렵 부모님을 여의고, 사제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입학했다. 6·25가 한창인 1950년 11월에 사제서품을 받아 거제도와 제주도 포로수용소에서 군종신부로 활약하다 종전이 되자 장호원본당(현 청주교구 감곡본당) 보좌신부로 부임한다. 그곳에서 가난에 시달리는 농민을 보며 농민공동체 운동을 펼치지만, 결과는 미약했다. 장대익 신부는 이 땅의 가난한 민중을 위해서 협동조합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캐나다로 유학해 신용협동조합운동을 공부했다. 뒤이어 미국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유학 기간 장대익 신부는 골프장 풀 뽑기나 베이비시터 일을 하면서 학비를 벌기도 하고, 힘들게 번 학비를 다른 유학생 신부들에게 주기도 하고, 선한 이웃의 도움을 받기도 하면서 사랑, 헌신, 이웃의 의미를 가슴에 새겼다. ‘일인은 만인을 위해, 만인은 일인을 위해’라는 신용협동조합의 정신을 체득한 것이다.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장대익 신부는 1960년 가톨릭중앙신협을 설립하는데, 이는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가 설립한 부산의 성가신협과 더불어 우리나라 신협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1965년에는 브라질 한인공동체 담당 신부를 맡아 이민단을 이끌고 브라질로 가서 2년간 한인 이민자들을 위해 헌신했다. 한국에 돌아온 이후에는 서울 대방동, 종로, 잠원동, 수유동 등에서 주임신부로 있으면서 종로성당을 포함해 여섯 군데서 성전을 건축해 노동자 신부로 불렸다.

장대익 신부의 삶을 돌아볼 때면 하나의 일관된 모습이 보인다. 신용협동조합이란 씨앗을 뿌렸을 뿐 아니라, 일생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자조와 협동이란 신협의 정신을 실천했다는 점이다.

특이한 점은 장대익 신부가 신용협동조합의 어머니로 불리는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와 일생을 통해 세 번의 의미 있는 만남을 가졌다는 사실이다. 첫 번째는, 고향 신의주성당에서 수녀와 복사服事 소년으로, 두 번째는 피난지 부산에서 갓 서품을 받은 사제와 노수녀로, 세 번째는 캐나다 안티고니시에서 신용협동조합을 공부하는 학생으로 만났다. 가브리엘라 수녀는 1993년 5월 12일 선종했고, 15년 후 같은 날인 2008년 5월 12일 장대익 신부도 선종했다.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은 그 길에서 운명처럼 만나게 되는 모양이다.

만약 장대익 신부가 신학교 선배인 김수환(1922~2009) 추기경이나 신학교 친구인 윤공희(1924~ ) 대주교처럼 캐나다로 협동조합을 배우러 가는 대신 이탈리아로 신학을 배우러 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신의 말씀을 전하는 사제가 아니라 신의 마음을 전하는 사제로 살아온 장대익 루도비코 신부. 그 삶을 따라가다 보면, 사랑과 헌신으로 역사한 신의 발자취가 보인다.

신의 마음을 전한 신부 장대익 신부
  • 1923. 01. 10. 평안북도 신의주 출생
  • 1941. 서울 동성상업고등학교 졸업
  • 1943. 덕원신학교 입학(추후 일본군 징집으로 학업 중단)
  • 1947. 덕원신학교 복학
  • 1948. 서울 성신대학교(현 가톨릭대학교) 졸업
  • 1950. 11. 21. 사제서품
  • 1951~1952. 거제도 유엔 포로수용소 종군사제로 사목
  • 1953. 09.~1957. 충북 음성군 장호원(감곡)본당 보좌신부로 사목
  • 1957. 09. 01. 캐나다 노바스코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대학에서 신용협동조합운동 전공
  • 1958~1959. 미국 뉴욕 포드햄 대학 대학원에서 사회학 전공
  • 1960. 05. 14. 협동경제연구회 가톨릭중앙신용협동조합 발기인 회의
  • 1960. 05. 28. 협동경제연구회 가톨릭중앙신용협동조합 발기인
  • 1960. 06. 26. 가톨릭중앙신용협동조합 창립(계성여중 음악실)
  • 1962. 03. 27. 답동신협 조직(인천 답동 천주교회 신자 36명, 출자금 6만 환)
  • 1962. 04. 08. 기독교양친회신협 조직
  • 1962. 04. 22. 신당동천주교회신협 조직
  • 1963. 후암동본당 주임
  • 1965. 11. 19. 가톨릭 이민단 지도신부로 브라질 파견
  • 1971. 06. 대방동본당 주임
  • 1976. 05. 상도동본당 주임
  • 1981. 종로본당 주임
  • 1987. 잠원동본당 주임
  • 1994. 수유1동본당 주임
  • 1998. 10. 09. 은퇴
  • 2000. 04. 20. 금경축(서울 명동성당)
  • 2008. 05. 12. 선종(오후 2:13 강남성모병원, 향년 85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