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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10월호

나라 잃은 한을 담다
초가을 발표된 명곡,
‘목포의 눈물’ 이난영

식민지 시대 고된 삶으로 기댈 곳이 없던 백성들에게 음악은 큰 위안이었다.
특히, ‘목포의 눈물’은 나라 잃은 백성의 마음을 대변하는 동시에 그들을 위로하는 곡으로 발표 후
87년이 지난 지금까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1935년 여름의 기운이 막 가신 9월 발표된
‘목포에 눈물’을 들으며 나라 잃은 한을 달래던 조상들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QR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가요계의 샛별,
민족의 한을 부르다
본명이 이옥례(李玉禮)인 이난영은 1916년 전라남도 목포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힘든 가정에서 자라던 이난영은 16세 즈음 태양극단의 순회공연 중 막간 무대에서 부른 노래를 인정받아 순회극단을 따라 나서며 가수 생활을 시작했다.
삼천가극단이 일본에서 순회공연을 할 때 작사가인 강사랑이 이난영의 재능을 알아보고 오케레코드사의 사장인 이철에게 추천했고, 이후 1932년 문호월의 곡 ‘고적’을 처음으로 취입하며 본격적으로 가수 생활을 시작한다.
향토 노래 현상 모집을 통해
완성된 ‘목포의 눈물’
1935년 초 조선일보는 일제의 탄압 속에서 우리 민족을 위로하기 위한 문화사업의 하나로 향토 노래를 현상 모집했고, 여기서 입선된 문일석(文一石)의 작품에 손목인이 곡을 붙인 ‘목포의 눈물’이 탄생했다.
이난영이 부른 이 곡은 크게 인기를 얻었고 그는 가요계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후 1936년 20세가 되던 해에 가요작곡가 김해송(金海松)과 혼인하며 가족이자 동반자로서 음악활동을 함께 하며 많은 히트곡을 탄생시켰다.
우리나라 최초의
걸그룹 활동도
1939년에는 ‘오빠는 풍각쟁이’의 박향림, ‘연락선은 떠난다’의 장세정, ‘화류춘몽’의 이화자 등과 함께 ‘저고리 시스터즈’라는 이름의 그룹을 만들어서 활동했는데, ‘저고리 시스터즈’는 한국 최초의 걸그룹으로 꼽힌다.
이 외에도 이봉룡 작곡의 ‘목포는 항구다’, 김해송 작곡의 ‘다방의 푸른 꿈’ 등을 부르며 당대 최고의 유명 가수로 자리매김했다. 광복 후에는 ‘김시스터즈’라는 3인조 재즈 걸그룹을 만들고, 이들을 음악적으로 훈련시켜 성공시키며 제작자로서도 성공을 거둔다.
한국가요사의 불후의 명작
‘목포의 눈물’
이난영이 19세 되던 해에 오케레코드사에서 발표한 ‘목포의 눈물’은 무려 5만장이나 팔려나가며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그 억울함으로 입으로 내뱉지도 못하던 시절, ‘목포의 눈물’은 통한을 담은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며 오랜 기간 사랑받았다.
이 곡이 나올 당시 2절 시작 첫 가사인 “삼백 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라는 구절이 왜적을 무찌른 이순신 장군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이 문제가 되어 ‘삼백연 원앙풍(三柏淵 鴛鴦風)은’ 으로 수정되기도 했다.
이난영은 이 곡으로 가요계의 여왕 자리에 올랐으며, 식민지 시대 가엾은 백성들은 이 노래로 위안받았다. 해방 후에도 전쟁으로 피폐해진 이들의 마음을 달래던 이 곡은 지금도 끊임없이 불리고 있는 곡 가운데 하나이다. 목포의 유달산 중턱에는 이 곡을 기념하기 위한 이난영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씨 아롱 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삼백년 원한품은 노적봉 밑에
임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임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깊은 밤 조각달은 흘러가는데
어찌타 옛 상처가 새로워진가
못 오는 임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에 맺은 절개 목포의 사랑
-‘목포의 눈물’ 가사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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