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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6월호

개화와 쇄국 사이에서
흥선대원군 vs 빅토리아여왕

VS Report
동 시대에 나라를 이끄는 리더로서 각기 다른 정책으로 오랜 기간 영향을 미치고 있는 지도자들이 있다.
바로 흥선대원군과 빅토리아 여왕.
두 인물은 나라의 평안과 발전을 위해 쇄국정책과 제국주의로 대표되는 두 가지 정책으로 각기 나라를 다스렸다.
격변하는 세계 정세에서 다른 선택을 한 이들에 대해 살펴보고, 현재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을 함께 생각해 보자.
흥선대원군
(1820년~1898년)
조선 고종 때의 정치가
쇄국정책
한국 근대사에 많은 영향을 끼친 풍운아
왕의 아버지이자 정치가
조선 말기 마지막 대원군
조선 고종 때의 정치가(1820~1898)인 이하응(李昰應)은 고종의 아버지이다. 흥선대원군은 조선의 역사상 유일하게 생전에 대원군이 된 인물로, 우리는 흔히 대원군이라고 하면 흥선대원군을 떠올린다. 그만큼 흥선대원군은 고종 재위 초기 정치를 주도하며 조선 말기와 한국 근 현대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 받는다.
흥선대원군은 아들 고종이 12세에 왕위에 오르자 섭정에 나서 권력을 잡았다. 이후 조선의 병폐로 지목되던 서원을 철폐하고 세도 정치를 억제하며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는 등 개혁을 진행해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다. 한편으로는 무리한 경복궁의 중건, 천주교에 대한 탄압, 통상 수교의 거부 등을 통해 조선 백성들의 원망을 듣기도 하였다.
그가 활동하던 당시는 조선을 둘러싼 세계 정세가 급변하고 있었다. 그가 주장한 쇄국정책은 다른 나라와 관계를 맺지 않고 문호를 굳게 닫아 서로 통상하지 않는 정책으로, 조선은 전 세계적인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도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이지 않고 문을 굳게 닫고 있었다.
흥선대원군은 청나라에 대한 문물을 제외하고 모든 나라에 대해 문호를 닫았는데 사실 대원군도 처음에는 서양과의 교류를 위해 교섭을 시도하는 등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했으나, 서양과의 통상이 좌절되면서 쇄국정책으로 노선을 변경했다.
특히 그의 쇄국정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문이다. 병인양요는 1866년 10월 26일~12월 17일까지 프랑스와 치렀던 전쟁이며, 신미양요는 1871년 6월 1일~11일까지 미국과 치렀던 전쟁이다.
두 전쟁 이후 흥선대원군은 적극적인 쇄국정책을 펴게 되고 이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그를 비판하는 이들은 ‘우리나라의 근대화가 뒤처지는 원인이 되었다’,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다’라고 말하며, 옹호하는 이들은 ‘근대 문명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정책을 지켰다’ 등의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이처럼 그에 대한 평가가 엇갈림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선 말기와 근현대사를 공부할 때 가장 중요한 인물로 꼽힌다. 그를 통해 격변의 세계 정세 속에서 권력자의 선택이 오랜 기간 한 나라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빅토리아 여왕
(1819년~1901년)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여왕,
인도 제국 여제
제국주의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의 최전성기를 이끌다
‘빅토리아 시대’를 이끌며
근대 영국의 기틀 마련
대영제국, 아일랜드 연합왕국과 인도의 여왕인 빅토리아(Victoria, 1819년 ~ 1901년)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렸던 대영제국의 최전성기를 이끈 왕으로 그가 통치한 기간은 ‘빅토리아 시대’로 통칭된다.
1837년 6월 20일, 여왕으로 즉위한 빅토리아는 재위 기간이 가장 긴 영국 왕이라는 기록과 함께 영국 군주로서 최초로 인도제국의 황제로서도 군림했다.
이후 64년간의 재위 기간 동안 안정적인 왕권을 수립하며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영국 왕실의 전통의 기틀을 마련했다.
1840년 아편전쟁에 승리해 중국을 굴복시키고, 1857년 세포이 항쟁을 진압하며 인도의 황제 자리에 올랐다. 1877년에는 이집트와 아프리카까지 영국의 식민지로 삼았다. 당시 영국 영토를 따져보면 지표 면적의 약 20%에 달할 정도였다.
산업혁명 성공 이후 발전 가도를 걷던 영국은 이때부터 세계의 경제를 쥐고 흔드는 대국이 되며 역사상 최고의 번영을 누렸다.
영국의 전성기를 시대적인 영향이라고 평가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 같은 영광에는 빅토리아 여왕의 역할이 컸다. 그는 권력을 휘두르기 보다는 적재적소에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며 국사 전반에서 인재 등용에 힘썼다.
그의 치세로 인해 영국은 자본주의의 선두 선진국이 되는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디즈레일리와 W.글래드스턴으로 대표되는 2대 정당제 의회정치를 확립했다.
다만 영국이 빅토리아 시대를 맞이하며 최전성기를 누리고 있을 때 아시아, 아프리카 등 제3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영국의 식민지 정책으로 인해 고통을 겼었다는 것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