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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호

조선을 바꾼
두명의 실학자
채제공 vs 정약용

조선의 실학자들은 애민 사상을 바탕으로 백성을 위한 실용적인 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실학자들의 노력은 조선 후기 경제에도 큰 발전을 가져왔다.
중상주의와 중농주의의 두 갈래로 나뉘는
조선시대 경제학을 채제공과 정약용의 업적을 통해 살펴본다.
한 나라의 지도자의 문제의식과 그들이 내어놓는 정책들은 국민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친다. 특히, 나라의 경제 정책은 한 나라의 흥망성쇠를 이끌 정도다. 채제공과 정약용은 조선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백성들을 위한 다양한 정책을 선보였다. 이들은 각각 중상주의와 중농주의라는 큰 틀 안에서 백성들의 풍족한 삶을 위한 방안을 구상하며 조선의 발전을 꿈꿨다.
채제공(蔡濟恭)
1729년 ~ 1799년
조선 후기의 문신
중상주의
신해통공 주장
조선 후기의 문신, 남인 최고이자
최후의 거물 정치가. 사도세자의 스승
재화와 용역이 생산자에서 소비자에게 전달되는 모든 과정을 일컫는 상업은 조선 후기, 화폐의 광범위한 보급과 함께 크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조선의 상업은 납세의 의무를 지는 대신 상품의 독점 판매권을 가지는 비단·무명·명주·모시·종이·어물을 파는 육의전(六矣廛)을 중심으로 발전했는데, 조선 후기 난전이 등장하며 상인들간 갈등이 시작됐다. 시전 상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지킬 수 있는 난전 금지를 정부에 요청했고, 이렇게 시작된 금난전권은 새로운 상인의 등장과 조선화폐경제의 발전을 저해했다.
일찍부터 상업과 시장문제에 관심이 많던 채제공은 재상의 반열에 오르자 이 문제를 정책 개혁의 화두로 삼아 중상주의 정책을 펼쳤다. 조선 백성들의 편의와 나라의 화폐경제 발전을 위해 금난전권의 폐지를 주장했고 정조는 그의 주장을 받아 들여 1791년 금난전권을 폐지하는 신해통공을 실시한다. 금난전권의 폐지로 인해 상인들은 육의전의 상품을 제외한 모든 상품은 특혜 없이 자유롭게 판매할 수 있게 되었다.
금난전권의 폐지는 독과점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을 막고 시장경제 활성화를 시도한 것으로 평가된다. 신해통공은 조선의 상품 유통과 화폐 경제 발전의 분수령이 됐다. 변화하는 사회 현실에 발맞춘 그의 고민과 노력은 조선 후의 경제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다.
정약용(丁若鏞)
1762년~1836년
조선 최고의 실학자 및 저술가
중농주의
정전론 주장
문장과 경학(經學)에 뛰어난 실학자,
저술가로 실학 사상을 계승·집대성
조선은 근본적으로 농업국가였다. 백성들이 삶의 근본이 땅에 있다고 생각했던 조선은 황무지 개간, 영농기술 개발 등을 통해 백성의 삶이 더욱 윤택해 질 수 있도록 다양한 토지제도 시행을 위해 노력해 왔다.
조선 후기 뛰어난 실학자인 정약용은 조선의 대다수 백성이 농민인 만큼 백성들의 행복을 위해서는 농업의 발전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젊은 시절 실학의 세계를 접한 정약용은 더욱 현실적이고, 백성을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토지 정책에 대해 고심했다. 특히 그가 주목한 것은 지주, 소작 관계의 불공정성으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폐단에 관한 문제였다. 조선의 토지는 대부분 관료나 양반들이 소유하고 있었고 농업에 종사하는 백성들은 스스로 토지를 경작하고 세금을 낼 형편이 되지 못했다.
고심하던 정약용은 1799년 <전론>에서 토지개혁론인 ‘여전론’을 주장한다. 여전론에는 일체의 토지 사유를 허용하지 않고 농사짓는 사람에게만 토지 점유권과 경작권을 줘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다만 여전론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전국의 모든 땅을 소유해야 가능했기에 당장 실현이 어려웠다. 실학자였던 정약용은 당시 조선의 현실을 감안해 여전론에서 한발 물러선 ‘정전론’을 제안한다. 정전론은 현재 개인의 땅을 인정한 상태에서 점차 공동 경작을 늘려가는 방식으로 실제 노동량에 따라 토지를 소유할 수 있도록 하자는 주장이 담겨 있다. 이 주장은 당시로는 매우 파격적인 토지공개념을 담고 있어 실제적인 현실 적용은 쉽지 않았지만 현실을 인정한 토대에서 백성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토지개혁 노력으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