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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6호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
Mary Gabriella Mulherin

CU 메모리

희망을 꿈 꿀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우리 민족에게
내일을 살아갈 희망을 일깨워주고,
누군가의 원조가 아닌 이웃과 함께 스스로를 구할 수 있는 힘을 길러준
푸른 눈의 이방인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
우리는 그녀를 ‘한국 신협운동의 어머니’라 부른다.

“구제사업은 기간이 길어지고 아낌없이 주어지면 전쟁처럼 파괴적인 것이 된다.
그들에게는 단순한 구제를 넘어서는 그 이상의 무엇이 간절히 필요했다.”

메리놀 선교회 소속의 한 수녀가 한국 근대사 속으로 들어왔다. 이 한 걸음은 그녀가 걸어가야 할 보이지 않는 운명이었다. 그때, 나머지 일생을 한국인을 위한 헌신, 희생, 사랑을 하게 될 것이란 걸 알았을까.

일제강점기와 6·25를 거친 한국의 모습은 이보다 더 나빠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처참했다. 전쟁에서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치유할 수 없는 상처와 함께 전쟁보다 더 참혹한 ‘삶’이라는 전쟁을 치러야 했다. 국제구호단체가 한국에 지원을 나섰지만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왜 유럽이나 미국, 캐나다 같은 선진국은 풍요롭고,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사람들은 가난하고 힘들까?’, ‘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원치 않은 불평등을 가지고 살아야 할까?’ 한국에 처음 왔을 때부터 가브리엘라 수녀가 지녔던 의문에 대한 답이 떠올랐다. 스스로 고기를 낚는 방법을 익혀야 하는 것이다.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교육이며,교육은 신협의 피입니다.”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는 한국 국민이 스스로 고기를 잡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던 중 1957년 11월 동료로부터 캐나다 안티고니시 운동을 소개받고, 이 운동이야말로 한국 실정에 맞는 서민을 위한 협동조합운동의 대안임을 직감했다.

늘 용감하고 거침없던 수녀는 망설임 없이 태평양을 건너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대학을 찾아가 2개월간 안티고니시 운동을 배우고 1958년 1월에 한국에 돌아와 협동조합운동을 시작했다.

1960년 5월 1일, 메리놀 수녀회의 나사렛의 집에 27명이 모였다. 이들은 한국 최초의 민간 금융협동조합 성가신협을 만들고 최초의 조합원이 되었다. 신협 교육은 전국에 등불처럼 번져 나갔다.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는 ‘교육은 신협의 피’라는 신념으로 조직의 힘을 강화하기 위해 교육에 더욱 힘썼다.

“한국에서 신협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오직 한 가지였습니다.
그것은 사랑이었습니다.
2,600만 한국 국민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는 돈과 사랑의 관계를 명쾌하게 정리했다. 신협운동의 시작과 목적, 비전은 나를 위해서 물질을 모으는 게 아니라 이웃을 위해서 함께 모으는 것이며, 혼자서는 자립이 어려우므로 서로 도와가며 자립을 이루는 것이었다. 돈도 마찬가지였다. 전통적인 유럽의 농부들은 콩을 세 알 심는다. 한 알은 자신을 위해, 다른 한 알은 이웃을 위해, 또 다른 한 알은 벌레나 비둘기 등 자연을 위해서다. 콩을 세 알 심는 것은 신협에서 금융을 다루는 방식과 같았다.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가 신협이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운동이라고 강조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신협운동이 부자가 되기보다 공동체 문화를 만들어가는 사회운동이라고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가 늘 강조했던 ‘사랑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