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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6호

잊지마 나의 소중한 이름
대만 지우펀

영감이 깃든 공간
글.손은경

하루하루가 살아내야 하는 미션처럼 느껴진다.
‘밥벌이’의 무게에 진짜 나라면
절대 웃지 않을 상황에서 웃고,
참는 게 이기는 거라며
자조 섞인 정신승리로 참아낸다.
본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며
사회생활을 할 수 없다면
여러 종류의 가면을 쓸 수밖에.
하지만 여러 겹의 가면에 잠식되어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
내 이름이 뭐였지?
길을 잃었다.
그때 하나 둘씩 켜지는 홍등.
빨간 등불을 따라 갔다.

대만의 타이페이에서 버스로 대략 1시간 반 조금 안 되는 곳에 자리한 지우펀. 구불구불 이어진 비탈길을 따라 늘어선 건물들에는 시간의 때가 묻어 있다. 흘러 흘러 걷다 마주한 급경사의 계단길.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배경지가 된 ‘수치루’가 나온다. 해가 지면서 수치루 계단을 따라 늘어선 가게들이 홍등을 켠다. 그 붉은빛이 만들어내는 장관은 지우펀의 황홀한 풍경이다.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 ‘치히로’는 알 수 없는 세계로 휘말려 들어간 온천장에서 본래 이름을 잃고 ‘센’이 된다. 온천장의 주인 유바바는 이름을 빼앗으며 온천장 안의 존재들을 지배하고 있다. 이름을 잃은 존재들은 더 이상 자신이 누구인지 관심 없다. 문제 될 것도 없고, 그저 그렇게 살아갈 뿐이다. 하지만 치히로는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센’이라는 이름에 묻히지 않고 용감하게 나아간다. 이렇게 어린 소녀인 치히로는 성장한다.

“좋은 이름이구나. 자신의 이름을 소중히 해야해.”

“이름을 빼앗기면 돌아가는 길을 잊게 돼.”

쭉 뻗어 있는 홍등을 보며 치히로의 조력자 하쿠의 말을 떠올려본다. 이름을 잃고 나에게 돌아가는 길을 잊기 전에 발길을 옮긴다. 나의 이름으로 굳건히 서 있는 세계로. 붉은 빛이 뒤로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