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의 타이페이에서 버스로 대략 1시간 반 조금 안 되는 곳에 자리한 지우펀. 구불구불 이어진 비탈길을 따라 늘어선 건물들에는 시간의 때가 묻어 있다. 흘러 흘러 걷다 마주한 급경사의 계단길.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배경지가 된 ‘수치루’가 나온다. 해가 지면서 수치루 계단을 따라 늘어선 가게들이 홍등을 켠다. 그 붉은빛이 만들어내는 장관은 지우펀의 황홀한 풍경이다.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 ‘치히로’는 알 수 없는 세계로 휘말려 들어간 온천장에서 본래 이름을 잃고 ‘센’이 된다. 온천장의 주인 유바바는 이름을 빼앗으며 온천장 안의 존재들을 지배하고 있다. 이름을 잃은 존재들은 더 이상 자신이 누구인지 관심 없다. 문제 될 것도 없고, 그저 그렇게 살아갈 뿐이다. 하지만 치히로는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센’이라는 이름에 묻히지 않고 용감하게 나아간다. 이렇게 어린 소녀인 치히로는 성장한다.
쭉 뻗어 있는 홍등을 보며 치히로의 조력자 하쿠의 말을 떠올려본다. 이름을 잃고 나에게 돌아가는 길을 잊기 전에 발길을 옮긴다. 나의 이름으로 굳건히 서 있는 세계로. 붉은 빛이 뒤로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