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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8월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천재 화가,
알고보니 미루기의 천재!

우리는 대개 미루는 것을 게으르고 나쁜 것이어서 바꾸어야만 한다고 인식하고 있지만, 최근 ‘미루기’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며, 오히려 결정을 늦추는 신중하고 현명한 자세라는 새로운 시각이 꾸준히 제시되고 있다. 예를 들어 와튼 스쿨의 최연소 종신 교수 애덤 그랜트는 그의 저서 <오리지날스>에서 Procrastinating(미루기, 질질 끌기)에 대한 다양한 연구 결과와 함께 그것을 역사적으로 독창적인 인재들의 공통점 중 하나로 소개한다. 그리고 대표적인 예로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의 전성기를 이끈 천재 화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1452-1515)를 꼽았다. 실제로 그는 일을 제때 끝내지 못하는 것으로 악명 높았다. 그리고 멈추기를 반복하다 포기하거나 아예 시작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다 빈치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 치고 남긴 그림도 별로 없다. 다 빈치가 그린 것이 확실한 그림은 24점 정도이고, 그중 10여점은 완성하지 못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 있어 미루기란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일종의 ‘전략’이었다기 보다는 스스로 자신감이 부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스승 베로키오를 능가하는 뛰어난 실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베로키오 밑에서 함께 수련했던 친구들보다 5년 늦게 독립했고, 독립한 이후 5년간 주문 받은 10점도 안되는 그림 중 절반은 완성하지 못했다. 심지어 피렌체 정부에서 들어온 중요한 주문은 아예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 보티첼리, 페루지노, 기를란다요 등 그의 동료 화가들이 바티칸 교황청에 초청받아 시스티나 채플 벽화를 꾸미는 동안 그는 ‘레오나르도, 네가 완성한 게 뭐가 있는지 말해봐…’라며 일기장을 자기 원망으로 채웠다.
고향과도 다름없는 곳이자 이탈리아 미술의 중심지인 피렌체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 서른 살의 레오나르도는 살길을 찾아 해외 취업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1482년 프란체스코 스포르차 공작에게 구구절절한 자기소개서 형태의 편지를 보내 밀라노 궁정에 간신히 입사했는데, ‘궁정화가’가 아닌 ‘야외극 제작자’로서였고, 5년 후에야 그는 ‘기술자 겸 화가’로 등록되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최후의 만찬>
1495-99년, 젯소, 레진, 템페라, 8.8×4.6m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소장
도미니크 앵그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임종을 지키는 프랑수아 1세>
1818년, 캔버스에 유화, 40×50.5cm, 파리 프티 팔레 미술관 소장

<최후의 만찬>으로
화가로서 이름을 알리다

밀라노 궁정 밥을 먹은 지도 10여 년이 넘었고, 나이는 마흔을 훌쩍 넘었건만 화가로서 간신히 초상화와 제단화를 몇 점 완성한 것이 전부였던 레오나르도가 드디어 화가로 이름을 알리게 된 작품은 1499년 그가 47세에 완성한 <최후의 만찬>(밀라노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소장)이다. 프란체스코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루도비코 스포르차가 밀라노 공작의 자리에 오르면서 주문한 그림이었다.
<최후의 만찬>은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린 벽화였고, 무엇을 그려야 할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 그리다 멈추기를 반복하며 약속한 기한을 훌쩍 넘겨버렸다. 레오나르도가 질질 끌며 그림을 그리는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노출되었고, 수도사 출신 소설가 마테오 반델로가 보았던 다 빈치의 모습은 다음과 같았다.
“다빈치는 어떤 날은 쉬지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은 채 하루 종일 그림을 그렸고, 어떤 날은 몇 시간씩 서서 그림을 노려보기만 했다. 갑자기 며칠씩 그림을 아예 그리지 않는 날도 있었으며 또 어떤 날은 다른 일에 몰두하다 갑자기 식당으로 뛰어 들어와 붓질을 한 두 번만 하고 돌아가는 날도 있었다…”
수도원장을 비롯해 많은 관계자들의 애간장을 녹인 끝에 1499년 완성된 <최후의 만찬>은 당시 사람들로서는 단 한번도 본 적 없었던 새로운 차원의 그림이었다. 레오나르도가 오랫동안 연극 무대를 제작해서였을까. 그는 마치 영화 감독이 영화의 한 장면을 연출하듯 모든 등장인물에게 생생한 캐릭터와 그에 따른 디테일한 액션을 부여했다. 무엇보다 예수를 배반하는 제자 유다만을 대놓고 따로 앉은 모습으로 그리던 다른 화가들의 관습적인 도상과는 달리, 레오나르도는 유다를 제자들 무리에 자연스럽게 앉히면서도, ‘나와 함께 접시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 그 자가 나를 팔아 넘길 것이다’ (마태 26;21)라는 예수의 대사를 인용하여 그 내용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유다를 알아볼 수 있도록 그렸다. 거기에 더해진 선원근법과 황금비율이 치밀하게 적용된 3차원적인 입체감은 동시대 다른 화가들이 그린 <최후의 만찬>과 확연한 차이를 보여주었고, 이 그림을 본 사람들은 놀라움과 경이로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림 완성이 늦어지는 레오나르도에게 제대로 급여를 지불하지 않던 루도비코 공작은 <최후의 만찬>에 너무 감동한 나머지 그에게 인센티브로 포도밭을 선물했으며, 밀라노를 공격하러 온 루이 12세의 군대는 <최후의 만찬>이 그려진 식당 벽을 뜯어 갈 궁리까지 했다. 루이 12세를 이어 프랑스의 왕이 된 프랑수와 1세는 아예 레오나르도를 프랑스로 모셔와 그림을 그리지도 않는 다 빈치에게 ‘왕의 수석 화가 겸 공학자 겸 건축가’라는 칭호를 내렸고, 그와 그의 조수들에게까지 거대한 저택과 넉넉한 연금을 지급했다. 프랑수와의 극진한 대접을 받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프랑수와의 품에 안겨 임종을 맞이했고, 세상에서 가장 꾸물거리던 이 화가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로 영원히 이름을 남겼다.
엄미나 대표
시그니처북스 엄미나 대표는 런던 크리스티 에듀케이션에서 근현대미술사를 전공하고, 디플로마 코스를 이수하며 현지 미술관 전문 투어 가이드로 활동했다. 현재 대기업 및 다양한 기관에서 강의 중이며, 창의적인 명화 감상 강의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2008년부터 서울시립미술관 도슨트로도 활동 중이다.
minaum6198@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