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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_2

‘전설의 시작’,
지금의 신협을 이끈 선구자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와
‘장대익 신부’

1900.5.29.~1993.5.12.
1900. 미국 펜실베이니아 스크랜턴 출생
1923. 메리놀수녀회 입회
1930. 한국 평양교구 부임
1942. 미국으로 귀국
1952. 주한외국봉사단체협의회(KAVA) 이사 역임
1960. 성가신협 창립
1964. 한국신협연합회 출범 및 전무 부임
1993. 93세를 일기로 선종

“이념과 철학이 확립되지 않은 신협운동은 진정한 신협운동이라 할 수 없고 교육 없는 신협의 발전 또한 있을 수 없다.”

한국전쟁 후 대한민국은 폐허나 다름없었다. 세상은 피난민과 이재민 천지였고, 식량난과 높은 물가고, 사채 등으로 빈곤층의 어려움은 더욱 컸다. 이때 한국 국민들이 자생할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한 외국인이 있었다. 바로 한국 신협운동을 태동 및 성장시킨 지도자 ‘한국 신협운동의 어머니’,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였다.

전쟁 미망인을 도우며 구호 활동을 펼치다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는 1930년 평양교구에서 선교 활동을 하며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한국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52년 다시 부산으로 돌아와 메리놀병원에서 전쟁 미망인을 돕는 등 구호 활동에 전념했다.
이후에는 사회사업과 협동조합을 공부하며 ‘협동조합’의 가치에 주목하고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협동조합의 조직과 운영 방법을 가르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알고 있는 지도자가 당시에는 없었다.

한국형 안티고니시 운동을 생각하다

주한외국봉사단체협의회(Korean Association of Voluntary Agency, KAVA) 이사이기도 했던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는 1957년 11월에 뉴욕에서 열린 KAVA 미국협의회에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그는 “한국 국민을 구할 수 있는 것은 그들 스스로 일어설 힘을 길러주는 길”이라고 역설했다. 그 응답으로 회의 참석자 가운데 한 명이 캐나다 노바스코샤(Nova Scotia)의 안티고니시 운동(Antigonish Movement)을 배울 것을 제안했다.
캐나다 동부 연안의 작은 어촌 지역인 안티고니시는 1929년 대공황 여파로 인구 감소와 심각한 빈곤에 시달렸다. 당시 그 지역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대학의 코디 교수와 제임스 톰킨스 교수는 빈곤의 원인으로 경제사회 구조의 모순과는 별도로 주민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부족한 점을 발견했다.
두 사람은 연구를 통해 협동조합운동의 청사진을 마련하고 운동가들을 배출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안티고니시를 포함한 노바스코샤주 일대는 부유한 동네로 탈바꿈했다.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는 안티고니시 운동이 한국 실정에 맞는 대안이라고 판단했고 1957년 12월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대학으로 날아가 2개월 동안 체류하며 코디 교수와 톰킨스 교수에게서 안티고니시 운동의 이론과 실제를 배웠다.

한국 신협운동을 정착을 위해 애쓰다

1958년 1월 한국에 돌아온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는 협동조합운동을 한국 국민에게 널리 알리고, 이들이 사회적·경제적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도록 돕기 위해 노력했다.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는 1959년 2월 3~6일 부산 메리놀수녀회에서 4일 일정으로 최초의 워크숍을 개최한다.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의 목표는 협동조합운동을 한국 국민에게 널리 알리고 뿌리내리게 함으로써 이를 통해 사회적·경제적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신협운동을 성공적으로 정착하고 확장시키기 위한 핵심 요소를 자발성이라고 보고, 이를 성취할 실천적 대안으로 교육사업을 통한 인식 변화를 도모했다.
성가신용조합은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가 선택한 방법론을 적용해 거둔 첫 성과이자 부산·경남을 시작으로 들불처럼 번진 한국 신협운동의 모태로서 큰 의미를 갖는다.

1923.1.10.~2008.5.12.
1923. 평안북도 신의주 출생
1948. 성신대학(현 가톨릭대학교) 졸업
1953. 충북 장호원(감곡) 성당 보좌신부로 사목
1957. 캐나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대학 신용협동조합운동 전공
1958~1959. 미국 뉴욕 포드햄 대학 사회학 공부
1960. 가톨릭중앙신협 설립
1963. 후암동성당 주임신부
1965. 가톨릭 브라질 이민단 담당신부
1998. 은퇴
2008. 85세를 일기로 선종

“모두가 힘을 합해 노력을 다하면 우리도 잘살 수 있다는, 내일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는 일이 절실했다.”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가 부산을 무대로 협동조합운동을 준비하던 무렵, 서울에서는 장대익 신부와 협동경제연구회가 또 다른 신협운동의 불씨를 마련하고 있었다.

‘생산자 협동조합’에 주목하다

평안북도 신의주 출신으로 1950년 사제 서품을 받은 장대익 신부는 1953년 충청북도 장호원성당 보좌신부로 부임한 뒤 전후 절대 빈곤에 시달리는 농민의 참상을 해결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으로 ‘생산자 협동조합’에 주목했다.
이후 충청북도 감목대리였던 파디(James V. Pardy) 주교로부터 안티고니시 운동을 소개받고 1957년 9월 캐나다 안티고니시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대학에서 1년 동안 협동조합운동을 배웠다.
이후 그는 미국 뉴욕 포드햄 대학에서 사회학 대학원 과정을 거쳐 귀국했다. 1959년 8월 서울교구 후원으로 서울 중구 소공동에 사무실을 낸 장대익 신부는 본격적으로 신협운동에 대한 구상을 구체화해나갔다.

‘가톨릭중앙신용조합’을 출범시키다

그는 신협운동의 붐을 일으켜야겠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 신협운동의 필요성을 알렸다.
신협운동이야말로 고리대금업 등의 사회악을 방지하고 재산 없는 서민들에게 필요한 돈을 융통해주며 무엇보다 미래를 위해 저축하는 정신과 서로를 돕고 의지하며 협동하는 정신을 기르기 위한 운동임을 역설했다.
1958년부터 ‘신용조합’을 연구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던 천주교 내 평양교구 소속 월남 신자의 모임인 협동경제연구회를 만난 그는, 이들과 힘을 모아 이듬해인 1960년 6월 26일 한국 최초의 신용협동조합 중 하나인 ‘가톨릭중앙신용조합’을 출범시켰다.

교육사업과 교도사업에 집중하다

그는 “신협의 생명은 사람이며, 조합원들에 대한 사랑과 그들이 서로 결속될 수 있도록 하는 조합원 중심의 신협 운영”을 강조했다. 이를 통해 인간의 존엄성 회복을 위한 사회봉사와 경제 질서 확립을 이룰 수 있다고 확신하며 교육사업과 교도사업을 중심으로 연대를 확대해나가고자 했다.
협동경제연구회의 활동은 당시 서민 대중 사이에 잠복하던 자립 의지가 발현한 대표 사례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이는 초창기 신협운동이 뿌리내리고 꽃피우게 될 민중적 토양의 성격을 말해주는 방증이기도 하다.
국내의 사정은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모든 국민이 상상할 수 없는 가난으로 고통받고 있던 때였다.
계속되는 물가고와 식량난, 그리고 일을 하고 싶어도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었다.
(…) 외국 구호단체들의 지원이 잇따랐지만 그것은 그저 ‘자선’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스스로 자립할 수 있다는 의지를 심어주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였다.
- 장대익 신부 회고록 〈남은 것은 당신뿐입니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