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과 철학이 확립되지 않은 신협운동은 진정한 신협운동이라 할 수 없고 교육 없는 신협의 발전 또한 있을 수 없다.”
한국전쟁 후 대한민국은 폐허나 다름없었다. 세상은 피난민과 이재민 천지였고, 식량난과 높은 물가고, 사채 등으로 빈곤층의 어려움은 더욱 컸다. 이때 한국 국민들이 자생할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한 외국인이 있었다. 바로 한국 신협운동을 태동 및 성장시킨 지도자 ‘한국 신협운동의 어머니’,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였다.
전쟁 미망인을 도우며 구호 활동을 펼치다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는 1930년 평양교구에서 선교 활동을 하며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한국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52년 다시 부산으로 돌아와 메리놀병원에서 전쟁 미망인을 돕는 등 구호 활동에 전념했다.
이후에는 사회사업과 협동조합을 공부하며 ‘협동조합’의 가치에 주목하고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협동조합의 조직과 운영 방법을 가르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알고 있는 지도자가 당시에는 없었다.
한국형 안티고니시 운동을 생각하다
주한외국봉사단체협의회(Korean Association of Voluntary Agency, KAVA) 이사이기도 했던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는 1957년 11월에 뉴욕에서 열린 KAVA 미국협의회에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그는 “한국 국민을 구할 수 있는 것은 그들 스스로 일어설 힘을 길러주는 길”이라고 역설했다. 그 응답으로 회의 참석자 가운데 한 명이 캐나다 노바스코샤(Nova Scotia)의 안티고니시 운동(Antigonish Movement)을 배울 것을 제안했다.
캐나다 동부 연안의 작은 어촌 지역인 안티고니시는 1929년 대공황 여파로 인구 감소와 심각한 빈곤에 시달렸다. 당시 그 지역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대학의 코디 교수와 제임스 톰킨스 교수는 빈곤의 원인으로 경제사회 구조의 모순과는 별도로 주민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부족한 점을 발견했다.
두 사람은 연구를 통해 협동조합운동의 청사진을 마련하고 운동가들을 배출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안티고니시를 포함한 노바스코샤주 일대는 부유한 동네로 탈바꿈했다.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는 안티고니시 운동이 한국 실정에 맞는 대안이라고 판단했고 1957년 12월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대학으로 날아가 2개월 동안 체류하며 코디 교수와 톰킨스 교수에게서 안티고니시 운동의 이론과 실제를 배웠다.
한국 신협운동을 정착을 위해 애쓰다
1958년 1월 한국에 돌아온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는 협동조합운동을 한국 국민에게 널리 알리고, 이들이 사회적·경제적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도록 돕기 위해 노력했다.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는 1959년 2월 3~6일 부산 메리놀수녀회에서 4일 일정으로 최초의 워크숍을 개최한다.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의 목표는 협동조합운동을 한국 국민에게 널리 알리고 뿌리내리게 함으로써 이를 통해 사회적·경제적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신협운동을 성공적으로 정착하고 확장시키기 위한 핵심 요소를 자발성이라고 보고, 이를 성취할 실천적 대안으로 교육사업을 통한 인식 변화를 도모했다.
성가신용조합은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가 선택한 방법론을 적용해 거둔 첫 성과이자 부산·경남을 시작으로 들불처럼 번진 한국 신협운동의 모태로서 큰 의미를 갖는다.